INSTALLATION VIEWS
PRESS RELEASE
Burning Eros, and Sculpture’s Cross-over Mediality
이 상 준 (조각가)
그 동안 박지현은 피어오르는 향불로 순지를 일일이 태워 낸 무수한 구멍의 집합을 통하여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9. 11 Down Town’같은 사건을 형상화한 -가느다란 향들을 병렬로 모아 자체의 덩어리를 이루어내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보여주는 신작들은 기존의 일관된 기법을 한 걸음 진전시켜나간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면모를 보자면 우선 기존의 순지에 향 대신 먹으로 드로잉을 한 후, 그려진 필선을 소화燒火시키고 그 살점을 이루었던 종이 파편들을 캔버스 위에서 다시 조립해 나가는 것이 눈에 띈다.
작가는 연속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간 해왔던 작업의 함축적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작업의 단계에서 수행되는 과정의 층위들은 다각적인 경로를 통해 분리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럼으로 해서 나타나는 변이들이 별도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작업)을 두고 배태되는 몇 가지 주요한 조각적인 양상들이라는 것이다.
완성된 그의 작업은 주로 벽면에 회화나 사진작품과 마찬가지로 설치되고 있어서 공간에 3차원적으로 개입하는 조각 작품의 일반적인 설치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된다. 또한 그런 이유로 인해서 그의 작업이 애초에 조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조각적인 관점에서 작업의 특질을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왔다. 사실, 지금의 우리들은 누구든지 쉽게 예술의 범주를 초월해내고 있으며 바야흐로, 형식이라든지 물성이라거나 하는 따위에 집중하는 고리타분한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조각가로서의 성향 때문인지 박지현의 모든 작업을 통해 자꾸만 조각적인 것이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고 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솔직하게 그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작업이 보여주고 있는 조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정리해 두려는 것은 작가의 관심이 최근에 다시 다양한 매체를 포섭해 나가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얘기들은 지금의 시점에서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당연히 제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지현의 작업에서 쉽사리 회화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혹은 오인될 수 있는-요소는 그 평면적 형태로부터 기인한다. 평면성이란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현대 회화의 논점에 있어 명제의 핵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또 한 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형태적 특성을 가늠해 나가는 데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는 매체로서 캔버스의 역할이 극히 소극적이며, 또한 은폐된다는 점에 있다. 그토록 전력을 다해서 문제 삼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포기될 수 없었던 평면적 질을 이루는 캔버스가 엄밀하게는 형상(물감)을 자신의 표면 바깥으로 밀어내는 보조적 수단, 즉 단순한 지지체로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쓰여 온 동양 서화의 기본조건으로서의 매체, 즉 화선지는 서구 캔버스와 다른 차원의 공간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은 비견될 수 있는 바탕/여백의 질적 차이로서 재료의 삼투성으로 드러나는 공간의 매체적 특질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박지현의 작업에서 고스란히 포착된다. 박지현에게 수묵은 평면 바깥으로 밀려나 시각적 환영의 상태를 이루는 종류가 아니라 질료에 안료를 빨아들이며 공간 속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나타나는 형상이 여전히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모든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비결정 상태의 매체를 향해 광활한 대지를 구획해 나가듯 설계가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하게 보여져야할 것이다.
먹물이 질료공간에 침투한 첨병으로써 배열과 배치를 끝낸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즉시 그 위치를 소각하는 것이며, 그로써 벌려지는 공간은 매체의 물질조직을 침식하고 나타나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타나토스Thanatos적 공간이 아니라 소멸을 통하여 확고함으로 다시 생성되는 ‘매스-공간massive space’이다. 변형된 공간은 물질 상태를 벗어나 추상적 형상으로 대체된 듯 나타나지만, 역설적으로 극히 구체적인 조각의 실재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매체를 두고 상투적으로 정리되었던 동양과 서양의 관점 차이 -전자는 꽤나 정신적이고 후자는 꽤나 물질적이라는- 를 어느 순간에 전환시키고 있다.
말한 바와 같이 초기 작업부터 박지현은 순지를 향불로 뚫어내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미세한 점들의 행렬 역시 물질(순지)이 소거된 상태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지만, 자신의 계기를 그 외부조건인 물질에 도리어 관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또한 개개의 핀 홀들은 서로간의 구성이 별도의 규칙을 갖지 않은 채 인덱시컬한 흔적indexical space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미 조각 작품에 나타나는 ‘구멍’을 두고 조각의 공간 기능에 대해서 설명했던 루돌프 아른하임 Rudolf Arnheim의 심리학적 분석을 소재삼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분석은 완결된 형상을 바탕으로 제시된 것이어서 활성적인 조각공간에 대한 적절한 예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그는 헨리무어 Henry Moore의 조각공간을 한정적인 것(限定空間, l`espace-limite) 과 주위적인 것(周圍空間, l`espace-milieu)으로 나누는데, 여기서 ‘구멍’은 압축된 형태로써 전통적 조각표면, 즉 고형적 제한점으로부터 주위 공간에 대한 환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조각을 둘러싼 공간에 조각자체의 공간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뿐, 그 의미를 개방하기보다는 양적으로 구별해내는 것에 머물고 만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분된 공간은 구성간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분리적 관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대칭으로서, 균형의 대등한 분배를 지각하게 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는 경계가 더욱 공고해지며 서로를 압박해 나가는 힘은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박지현의 공간은 연작에서 또 한 차례 변용한다. 순지에 그려진 먹을 따라 소화되는 불꽃의 경로를 ‘장시간 노출’ 기법으로 추적하는 이 촬영 작업에서, 몽환적으로 나타나는 빛의 이미지는 불꽃이 먹선에 점화되고 완전히 소각되기까지의 시간을 초 간격으로 계측해내고 있으며 소요된 시간은 곧 작품의 제명으로 붙여진다. 이것은 단순히 실제의 물리적 시간을 단위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만, 작가는 여기서 선형적 시간성과 대별되는 윤회의 절대성을 암시하고 있다. 한번 회전하는 랩 타임을 통해 소거와 생성은 동시에 이루어지며 그것을 받치는 동력, 즉 타오르는 불꽃 자체는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에 변화하는 매체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주체이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형상의 힘, 그 어떤 작은 존재라도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생동성을 강력한 엔진으로 표현하는 재현적 형상 또한 이러한 변화에 부수적이지 않으며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말이 맞다면 형상은 형태와 함께 매체의 기능을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던져놓는 힘이자, 서로가 점유하는 부분을 동시에 강하게 교차시키면서 나타나는 폭발력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조각의 상황은 급격히 물리적인 장field으로 이동하여 전개된다. 화염이 사하고 나면 질료-매체는 불에 잘리운 파편들로 분산한다. 이것들을 다시 모아내서 캔버스에 고착시키고 최종적으로 염하는 과정은 보다 심오한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바로 부스러진 파편들을 배접을 통해 복원해 내는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적 자료물을 복원시켜내는 방법과 유사하게 진행되지만 그러한 입장이 ‘사라진 존재’의 사료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인 반면, 박지현의 경우는 부활의 과정을 통해 또 다시 갈라지는 변이로서 ‘완전한 재생’을 이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모든 정황들이 완수되고 나면 비로소 박지현 조각의 실체적인 움직임과 그 해부적 면모를 조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가 작업과정에서 끊임없이 구상하고 해체해 왔던 것... 방독 마스크를 쓰고 타오르는 분진 속에서 갈라냈던 것들은 다름아닌 뼈와 살, 그리고 유령같은 그림자들이며 그럼으로 해서 최종적으로 우리 눈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조각의 몸이다.
시각과 정보를 기반으로 한 의심스러운 이미지들이 산재하는 세계와, 조각의 실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설정하고자 하는 조각가들에게 조각적인 상황과 조건에 대한 관심은 다시금 정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각의 각성은 매체의 범주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것에 있지 아니할 것이고 자체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에 닿아있다는 것으로 자명해진다. 작가는 언젠가 “하나의 힘과 평행을 이루는 힘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상황, 하나의 공간이 또 다른 공간으로 넘어설 때의 팽팽한 긴장상태를 느끼는 것에 더욱 관심이 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힘들이 펼쳐지는 곳에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감각이 형태와 형상, 실재와 가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고립되어버린 현실세계의 두 가지 극단에 대해 조각적인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일테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으로 주목해야할 것은, 조각이라는 것이 어떠한 매체를 규정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조각적인 것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어떻게 살아나고 있느냐를 보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