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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Uncertainty in Certainty 

Jisoc Han

확실성 속의 불확실성

 

이선영(미술평론가)

 

한지석의 작업실 한 벽면은 스크랩한 신문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막 붙여놓은 듯 시사성이 있는 것도 있고, 언제 어디서 일어난 무슨 사건인지 희미한 색 바랜 조각들도 보인다. 물론 스크랩한 사건들 간의 상호관계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는 그만큼 세상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고, 이러한 관심이 작품에 속속들이 반영되고 있는 것일까? 작가라는 존재는 사회적이든 비사회적이든 간에, 세상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현실에 대한 관심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해결책을 포함하여, 현실에 대해 작가가 주장하는 메시지를 그림에서 읽으려 드는 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인 것인가. 화가한테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러나 한지석의 작품의 출발이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이나 기사임은 부정할 수 없다. 장식물도 아니고, 작업에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작업실에 한가득 붙여 놓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도사진들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품은 모호하다.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것이 아니라, 팥이 나고 있다. 6하 원칙에 의해 서술 되었을 기사는 앞뒤가 딱 잘려져 있고,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분명한 인증으로서의 사진 또한 희미하다. 화면은 지운 듯 덮여 있고, 형태를 명료하게 규정지을 경계면은 녹아서 줄줄 흘러내린다. 이러한 형식상의 특징은 참조대상이 된 자료들이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 힘든 비극적인 사건들임을 짐작케 한다. 유사한 색상이나 시각 상 때문에 함께 연동되어 읽히는 퍼즐 같은 작품은 관객에게 작품에 반영된 현실이나 작가의 의도를 알아 맞춰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한지석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것은 관념에서 관념으로, 또는 사실에서 사실로 이동하는 동질적 변환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현실에서 관념으로, 사실에서 느낌으로,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표면에서 이면으로,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현상에서 가상으로의 지속적인 변환이 일어나는 장이다. 

 

한지석에게 진정한 사건은 이것과 저것 사이 그 경계 위에서 발생하며, 상태가 전이되는 격렬한 지점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어떤 사건이 인식될 때 아주 큰일과 아주 사소한 일이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임계점을 넘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경계에서 발생한 이 우연적 사건은 필립 볼이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예시하는 현대 물리학의 가설들, 가령 혼돈(chaos)과 복잡성(complexity)의 이론, 그리고 사회에서 나타나는 작은 효과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변화로 이어지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지질학의 격변설(catastrophe theory)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경향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의 관계를 다룬 ‘out of sight’(2010) 전이나, 금속이 액화되는 지점을 나타내는 용어가 등장하는 ‘white-hot’(2012) 전에서도 발견된다. 이전 전시의 작업이 한 화면에 여러 사건들을 중첩시켰다면, 이번에는 한 작품에 하나의 사건이 확대 또는 부분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에서도 경계의 문제는 여전히 전면에 자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200x780cm 크기의 대작을 가득 물들인 울트라 마린 블루가 동이 트기 직전 밤과 낮의 경계에 걸쳐 있는 색이다. 별빛 또는 달빛을 빌어서만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이 시간대는 모든 것이 신비한 베일을 씌운 듯 감춰져 있다. 덮는다고 완전히 없어지지 않듯이, 참조대상은 말소 하에 있다. 이 길지 않은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주조색인 파랑과 분홍 빛 도는 빨강은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이질적이다. 그것들은 신문에 난 사건사고들처럼 생경하게 마주치며 충돌한다. 신문의 한 면에서 희극과 비극이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공시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온통 자극적인 사건들로 도배되어 있는 신문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을 키운다. 재난은 신문을 보는, 아니 정보를 소비하는 대중들의 관점에 이미 내재해 있다. 작가는 불협화음과 어긋남을 회화에서 더욱 강조하고, 이를 통해 참조대상으로부터 비롯될 의미를 지연시킨다. 

 

파랑에 신비와 우울이 깔려 있다면, 분홍에는 비극과 연민이 깔려 있다. 분홍은 육체와 대지, 그리고 유한성을 연상시키고 파랑은 정신과 하늘, 그리고 무한성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둘은 무심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모노톤의 단순한 형상 속은 압축된 층들이 잠재되어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이 경계 위의 존재는 자기동일성을 끊임없이 해체해야만 비로소 자기가 성립될 수 있는 역설적 존재로서의 작가와 작품의 상황을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다란 전시장의 한 면을 가득 채우는 대작과 그와 대구를 이루는 작은 작품들로 이루어진다. 같은 크기의 작은 작품들은 대략 신문 크기 정도 된다. 가로 길이가 8미터 가까이 되는 가장 큰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사고로 폐기된 발전소 건물 중의 하나이다. 산업 현장을 힘차게 돌아가게 했을 에너지 생산 공장은 자연과 인공 합작의 재난 현장이 되었다. 원자 속에 갇혀 있었을 허(虛)의 몫은 폐허로 극대화 되었다.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은 위험 수위를 넘은 원자로인지 희생의 슬픔을 애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폐허의 장소는 심해에 가라앉은 듯 적막하다. 대지의 표면 위에 살짝 얹혀 져 있을 뿐인 첨단 문명의 산물은 해일처럼 몰아친 현실계의 힘에 무력하다. 보일 듯 말 듯 화면을 낮게 가로지르는,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기하학적 실루엣만이 그곳이 한 때 사람 사는 공간이었음을 예시한다. 문명이라는 그 거대한 배는 희미한 선만을 남긴 채 좌초되어 있다. 관객이 관람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발견할 줄줄 흘러내리는 얼룩은 재난이라는 것이 형태와 배경이 구별 불가능한 혼돈임을 알려준다. 여기에서도 여전히 에너지라는 것이 흐르고 있지만,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위해서는 아니다. 경계를 넘어선 힘은 재앙으로 다가온다. 환원을 벗어나는 초과, 또는 저주의 몫은 누군가에겐 열락으로 다가올 수 있다. 어쨌든 자연은 폐허조차도 넉넉하게 품는다.

 

중간 크기의 푸른 색 작품에도 건물이 나오는데, 그 출발은 어떤 부동산 광고에서 왔다. 매물로 나온 것이니 만큼 원래 사진은 멋지게 연출되었을 것이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상처처럼 베어진 듯 그어진 빛의 선들로 나타날 뿐이다. 적막 속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을 발동시킨다. 한지석이 경계를 흐리는 방식 중의 하나는 허연 막을 씌우는 것이다. 아이의 옆얼굴, 빌보드 판이 보이는 공원 같은 희끄무레한 풍경이 유령처럼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정확한 정보의 판독을 방해하는 방해물과 잡음이 안개처럼 끼어있다. 이러한 방해 공작은 기존의 것에 뭔가 새로운 것을 첨가해야만 하는 작가들의 강박 관념이 낳은 악취미인가, 아니면 모호함과 유희하는 탐미적 성향인가. 한지석은 전형적인 보도 사진이 심어놓은 명백한 코드를 탈 코드화시킴으로서, 빨리 읽고 버리는 정보 소비자를 불편하게 한다. 축 처진 꽃, 깃발을 들고 가는 사람, 휠체어의 바퀴 같은 도상은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물감과 어우러져 비극적인 느낌을 주지만, 작가가 스스로 발설하기 전에 그 이미지의 뜻을 알아채기는 힘들 것이다. 

 

종이컵을 들고 있는 손은 아예 어떤 뉘앙스조차도 없다. 주목할 만 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사소한 광경에는 향후 어떤 큰 사건으로 번질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보도사진이라면 반드시 대중과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정보가 심어 있기 마련인데, 작가는 거기에서 자신을 찔러오는 어떤 사소한 부분을 선택하여 회화라는 매체로 극대화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진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일,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 나오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 이라는 두 개념어의 대조를 생각하게 한다. 바르트는 사진 속의 무엇이 자신에게 돌연한 영감을 주는가를 알고 싶어 해서 그 책을 썼다. 그는 어떤 사진은 자신에게 미지의 것으로 생성되면서 나타나고, 또 어떤 사진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바르트는 그 책에서 자신이 사진에 흥미를 갖는 것은 그들을 정치적 증거로 받아들이건 훌륭한 역사화로 받아들이건 간에, 스투디움 때문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태도, 얼굴모습, 몸짓, 배경 그리고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문화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 온다. 푼크툼은 이 상처,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째 요소를 바르트는 푼크툼이라고 불렀다. 바르트는 스투디움이 잡다하고 무책임한 관심과 흥미, 취향과 호감에 속한다면, 푼크툼은 사랑에 속한다고 대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인 한, 죽음과 광기와도 연결될 터이다. 스투디움은 결국 언제나 약호(code)화 되지만 푼크툼은 그렇지 않다.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 실제로 나를 찌를 수는 없다. 이름붙일 수 없음을 고통의 확실한 징후이다. 그 효과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표정할 수 없는 인상이며, 자신의 기호와 이름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예리하게 주체의 마음 속 막연한 지점에 와 닿는다. 그것은 날카롭고 숨 막히며 침묵 속에서 소리친다. 바르트의 논의를 따라 간다면, 한지석의 작품은 사진이 제시는 하지만 강조하지 않는 어떤 사물이나 그 단편, 기사의 어떤 단어 하나가 작가로 하여금 그림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출발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붉은, 또는 푸른 물감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얼룩은 명백한 코드화를 지향하는 보도 사진에서 자신도 모르게 찍힌 어떤 요소의 찌름과 그로인한 상처의 증후이다.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으로 제어했다고 할 수 없는 한지석의 그림--가령 줄줄 흘러내리는 얼룩들은 비극적 세계관을 작가가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반쯤은 중력이 수행한 것이다--또한 관객에게 어떤 찌름을 야기한다. [카메라 루시다]에 의하면, 보도사진 등이 제시하는 스투디움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계약이다. 

 

정보제공, 표현, 포착, 의미부여, 욕망의 자극 등이 그 기능들이다. 그러나 늘 단일한 사진의 공간에서 하나의 하찮은 것이 나를 끌어당긴다. 흔히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 대상이다. 또한 푼크툼의 실례를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드러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사진으로 포착된 어떤 사건은 이미 하나의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된다. 사진의 의도로부터 벗어난 세부가 그림의 매개를 거쳐 증폭 된다. 보도사진으로부터 출발한 한지석의 작품에는 이러한 잉여와 초과, 무상적인 덧붙임이 있다. 대중에게 단숨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보도 사진은 온통 하나의 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그의 작품은 대상을 반쯤은 숨긴 채로 보여준다. 한지석이 구사하는 언어는 불투명하다. 투명한 창이나 거울이 아니라, 회화의 물질적 몸체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전형적인 보도사진의 수사학을 깊은 침묵에 몰아넣고, 대상 또한 불투명하게 한다. 

 

속도감 있는 붓질로 가려지거나 지워진 흔적들이 우울이나 연민을 낳는 색조에 잠겨있는 그의 그림은 사진에 불가피하게 내재되어 있는 죽음을 직시한다. 바르트도 같은 책에서, 모든 사진에 다 같이 존재하는 사자의 귀환을 강조했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은 역사적으로 19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죽음의 위기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다. 같은 세기가 역사와 사진을 만들어냈다. 저자에 의하면 의식(儀式)의 사라짐과 동일한 시기에 나타난 사진은 종교를 벗어나고 의식을 벗어난 비(非)상징적인 죽음이 현대사회로 침입해 들어온 것과 일치하는 현상이다. 사진은 맥 빠진 죽음의 시대를 증거 한다는 것이다. 한지석이 보도사진에서 보았을 재난의 현장들은 이미 죽음의 기호들로 가득했겠지만, 사진의 푼크툼은 사진이라는 형식 자체가 이미 죽음의 기호임을 강조한다. 다양한 재난 사진들은 죽음이 실현될 것이고, 또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진에는 나의 미래의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기호가 내재해 있으며, 그것이 나를 찔러오는 것이다. 한지석의 작품에서 온통 하나의 색조로 포화된 흐릿해짐은 부재와 죽음을 강조한다. 병적인 증상이 약간 비치는 아이의 실루엣이 나오는 그림은 탄생부터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를 하얀 막으로 도포한다. 작가에게 감흥을 주었던 세부가 확대되어 있는 그림은 보도 사진 속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해 장치는 언어의 불투명성을 증대시키면서 작가로 하여금 재현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의 작품은 사실을 인증하는 역할을 하는 사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재현은 재난과 폭력을 방조하고 고무하는 지배적 현실을 추인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현실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재난에 대한 탐닉과 소비가 있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미디어로 소비되는 재난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화려한 스펙터클 자체가 패자를 양산하는 자본의 행렬이라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한지석의 작품에는 폭력을 고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관객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이 있다. 앞서 인용한 푼크툼/스투디움의 개념어는 확실성/불확실성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가공할만한 폭력 역시 그의 작품에 도달한 즈음에는 불확실해진다. 그것은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법과 폭력이 다르지 않음을 길게 논증한 것과 같은 차원이다. 진정한 정의를 말하기 위해 데리다는 신비한 권위의 토대로 간주되는 법을 해체한다. 법에 결정 불가능한 것, 공약 불가능한 것이나 계산 불가능 한 것, 독특성과 차이, 이질성이 포함되어 있고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메시지로 고양될 수 있는 명료한 코드를 흐릿하게 하는 한지석의 선택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해체주의처럼 결정 불가능성에 기반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재현을 통해 재난을 추인하고 소비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지석의 그림은 데리다의 결론인 ‘해체는 정의’라는 언명에 걸 맞는다. 

 

데리다는 예컨대 어떤 판사의 결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단지 법이나 일반적인 법의 규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각각의 결정은 상이할 뿐 아니라, 기존의 법전화 된 어떤 규칙을 보증해서는 안 되는 특유한 해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정 불가능한 것은 계산 가능한 것과 규칙의 질서에 낯설고 이질적이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는 결정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며, 이것은 프로그램 될 수 있는 적용이거나 계산 가능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한지석의 작품에서도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험은 두드러진다. 모든 결정의 사건들에 결정 불가능한 것이 유령처럼 깃들어 있다. 

 

데리다는 정의를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의 경험, 불가능한 것의 한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해체주의적으로 다시 정의된 정의는 종교나 예술에 외재적일 수 없다. 정의는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한다. 확실성 속의 불확실성, 또는 결정 속의 결정불가능성이 있는 한지석의 작품이 막연한 불가지론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론과 상보적인 불가지론이기보다는 자연의 진정한 법칙인 통계적 사실에 가깝다. 깊은 푸름 속에 잠긴 나뭇가지 그림에서 보이듯이, 나뭇가지의 모양새는 자연에서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집중과 억압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임의적인 인간의 규칙에 자연의 진정한 다양성이 관철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재난을 줄이는 근본적 방책일 것이다. 그것이 한지석의 자연화 된 역사적 풍경이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메시지라고 믿는다.

 

 

 

Uncertainty in Certainty 

 

By Lee Sun-young, Art Critic 

 

Newspaper clippings are densely put on a wall of Jisoc Han’s studio. Some seem new as if addressing a current topic after being placed immediately and others appears dim and faded, covering old incidents we just vaguely remember. It is of course hard to find correlation among incidents in newspaper cuttings. Does he take a great interest in society and reflect this through his work? Any artist whether he is social or not has concern for society. However, his interest in society is not surely coincidental with his concern for reality. How is an attempt to read an artist’s messages on reality in his work ineffective? We should not anticipate this in a painter’s work. But, it is undeniable that his work is first inspired by newspaper photographs and articles. If this was not the case, he would not put such clippings densely on his studio wall. However, his work triggered by news photographs looks ambiguous.

 

As you sow, so shall you reap – but this is not true in Hans’ work. A newspaper article that may be written on the five Ws and one H principle has no context; and a photograph as certification for a fact or incident appears blurred. A scene in his work seems deleted or covered with something, and the outlines of form appear melted. This feature hints that referential events may be tragic incidents. His puzzling works entangled with similar hues do not call for viewers to predict the reality they reflect, or his intention. What occurs in Han’s work is not a homogenous transformation: from idea to idea; or from reality to reality. It is a field where constant changes occur: from concretion to abstraction, reality to idea, fact to feeling, certainty to uncertainty, external surface to the internal, the public to the private, and phenomena to imagination.

 

For Han a true incident takes place at the border, related to a point where a state undergoes change. He says “A great affair seems separate from a trivial affair, but they are persistently linked when they are perceived.” This accidental incident that takes place on a border, raising change beyond a critical point, recalls hypotheses in modern physics exemplified by Philip Ball in his book Critical Mass: How One Thing Leads to Another, such as the principle of chaos and complexity and also the catastrophe theory that denotes how a trivial effect in society creates a sudden shift. This tendency is also discovered in Han’s exhibitions like Out of Sight (2010) that address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and White-hot (2012) that employed terms signifying the liquefaction-point of metal. While Han overlapped a few events in one scene in previous works, an incident is enlarged or appears in part in pieces on display at this exhibition, but the problem of the border is still brought to the fore. 

 

 

Ultramarine blue adopted to dye a large piece (200x780cm) in this exhibition is the color at the boundary between day and night, before dawn. All is concealed as if covered with a mystic veil in a time zone when forms can be perceived with starlight or moonlight. Something here cannot be completely obliterated with covering, and referents are erased. This brief moment is also the time when the conscious intersects with the unconscious. The dominance of color in the exhibition, including blue and pink-red, does not harmonize but is a heterogeneous state. These colors awkwardly confront and collide like accidents and incidents reported by newspapers, as if comic and tragic incidents are synchronically arranged on the same page of a newspaper. The newspaper crammed with provocative incidents grows indifference and insensibility toward the world. A disaster is already in the perspective of the general public that reads it and consumes information. The artist further underscores dissonance and disturbance in painting, thereby deleting the generation of meaning from referents. 

 

Blue refers to mystery and depression in his work, whereas pink is suggestive of tragedy and pity. Pink is reminiscent of the body, the earth, and finitude, and blue of the spirit, the sky, and infinitude. The two, however, face each other indifferently: here, condensed layers are innate in a simple form in monotone. Existence on a border in an ambiguous state denotes the artist and his work’s condition as a paradoxical being that can exist only when they deconstruct self-identity. On display at the exhibition is an enormous work filling an entire wall of the venue and small pieces in contrast. The small works are roughly of newspaper size. The subject matter of the largest work - eight meters wide – is a nuclear power plant closed due to an accident. The plant for producing energy for industry was a disaster scene caused by nature and artificiality. The atom’s emptiness is maximized as a ruin. 

 

It is unclear whether the paint running down the canvas is to signify a nuclear reactor reaching a critical level or to mourn sacrifice. This ruined place appears desolate as if being submerged in a deep sea. The product of advanced civilization placed tenuously on the earth’s surface is helpless against the power of reality, surging like a tsunami. A geometric silhouette cutting across the scene hints that the place was once occupied by people. The enormous vessel of civilization is struck on a rock, leaving blurred lines. The stains running down show viewers their own moving line to indicate a disaster is a chaotic state where form and background cannot be distinguished. Energy still flows here, but is not for human safety or convenience. The force beyond the border may cause disaster. Excessiveness beyond reduction or curse may be pleasure for someone, but nature embraces even ruins. 

 

A building depicted in a middle-size blue work comes from a real estate advertisement. As the building is for sale, the photograph looks nicer than the real, but appears with lines of light like cut scars. The light leaking through desolation stimulates diverse imaginations in viewers. One of the ways Han blurs the boundary is to cover a gray veil. A baby’s profile and a dim scene like a part of a billboard appear like a ghost. Obstacles and noise preventing viewers from accurately deciphering information are inserted like fog in his works. Is this sabotage or a bad habit caused by the artists’ obsession to bring about something new, or ambiguity and a delightful esthetic tendency? Han makes viewers feel inconvenience by decoding clear codes carried by news photographs. Drooping flowers, someone carrying a flag, and an icon like a wheelchair wheel exudes a tragic feeling in accord with red paint flowing down, whose meaning is hard to grasp before the artist accounts for it. 

 

A hand holding a paper cup is without nuance, but a conspiracy turning into a big event lurks in this trivial scene that has nothing that draws attention. Every news photograph naturally conveys some information the general public may share. Han maximizes trivial parts that pierce him with the medium of painting. This reminds us of two contrasting terms, studium and punctum, which Roland Barthes coined in one of his well-known books, Camera Lucida. Barthes wrote this book with the hope of grasping what unexpectedly inspires him in a photograph. He explained that some photographs appear with something unidentifiable for him, and others are not. In this book Barthes said he feels interest in photographs whether he sees them as political evidence or remarkable historical paintings because of the studium.

 

That is why my involvement in an attitude, face, gesture, background, or action is something cultural. However, the second element comes to break the studium. This time I do not look for the element. It comes itself to pierce me like an arrow after leaving the scene of an event. Punctum is a Latin word referring to creating a brand with a pointed blade with a sharp edge. Barthes called this second factor that interrupts the studium punctum. Barthes defines the studium as slippery, irresponsible interest, inconsequential taste, and the order of liking, whereas punctum is love, contrasting the concepts of the two terms. As long as punctum is love, it may be associated with death and madness. Studium always becomes codified, but punctum does not. The namable cannot stab me. The unnamable is an apparent sign of pain. Although its effect is obvious, this is an expressionless impression. This cannot find its sign or name.

 

Nevertheless, the scene keenly reaches some vague point in the subject’s mind. This is acute and suffocating, crying out in silence. Following Barthe’s discussion, Han’s work informs that a thing that is presented but not underlined by a photograph, its fragments, and a word in a news article has the artist start toward another world of painting. The stains of red or blue paint running down are signs of wrestling with some elements photographed unwittingly in news photos seeking clear codification and of the wounds caused by this. Han’s painting cannot be said to be completely controlled consciously – for instance, the stains flowing down are not a representation of a tragic worldview by the artist but are half executed by gravity. According to Camera Lucida, studium presented by news photos is a contract between its producers and consumers. 

 

The functions of studium are offering information, expression, capturing, giving meaning, and stimulating desire. In the same space of a photograph however, a trifling element draws me. Punctum is usually a detail or a partial object. Showcasing an example of punctum is to reveal myself in a way. An event captured in photography here is not a sign but a thing itself. Some details deviating from a photographic intention are amplified by the medium of a picture. Such surplus, excess, and affixation are found in Han’s work derived from news photographs. A news photograph that has to be readable by the general public in a breath is content with showing an object as a whole, but his work showcases only half of the object. The language Han commands is not clear. It is not a transparent window or mirror. A painting’s material body stands out in his work. Han’s work drives news photographic rhetoric into a deep silence, making objects opaque.

 

The traces of his painting covered or deleted with seedy brushwork are submerged under tones exuding depression or sympathy. In the same book Barthes also underscores the return of the dead existing in all photographs. Death is the true nature of photography. For Barthes, the photograph has some connection with the crisis of death that historically began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same century created history and photography. According to the author, photography that emerged in the same age when rituals disappeared is a phenomenon in which a non-symbolic death departing from religion or rituals infiltrates into modern society. This means that photography testifies the era of death. Scenes of disasters Han discovers in news photographs are already filled with the signs of death. The punctum of a photograph underlines that the form of photography itself is a sign of death. A variety of disaster photographs allude that death will be attained or has already been attained.

 

An irresistible sign of my upcoming death is innate in a photograph, stabbing at me. Blurriness saturated with only one color in Han’s work puts emphasis on absence and death. A white layer representing a shadow of death is applied to the painting featuring the silhouette of a baby with a sign of disease. The painting with enlarged details underlines the uncertainty inherent in a news photograph. This interruption increases opaqueness in language, putting the artist some distance from representation. Han’s work derives from a photograph certifying some fact, but does not repeat it, because a representation assumes the role of ratifying a dominant reality, aiding and encouraging disaster and violence. It is undeniable that there has been an indulgence in and consumption of disasters in the name of criticism of reality. The scenes of disasters are consumed by the media, but splendid spectacles dominating modern society are violent in that these are caused by the dominance of capital producing losers.

 

Han’s work has no intention to denounce violence, but is within the mechanism of violence hurting viewers. The terms abovementioned, punctum and stadium, are replaced with certainty and uncertainty. An abominable violence becomes uncertain in his work. This recalls Jacques Derrida proving that law does not differ from violence in his essay Force of Law (Force de loi). Derrida deconstructs the law, regarded as the foundation of a mystic authority, to allude to a true justice. He asserts that the indeterminable, unpledged, and incalculable, distinction and difference, and heterogeneity are included and must be included in the law. Blurring apparent codes enhanced by social messages, Han underlines that humanity’s true freedom is anchored to indeterminacy as in de-constructivism. 

 

Han also shows his will not to admit and consume disasters through representation. In this sense, Han’s painting may reflect Derrida’s conclusion that “Deconstruction is justice.” Derrida argues any judge must not merely follow the law or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law to justify his decision. He means that such decision has to be regular and irregular simultaneously, and the law has to be preserved and reinvented at every moment, demanding a peculiar interpretation, and that each decision has to be disparate, and must not certify rules in established articles of the law. The indeterminable is strange and heterogeneous to the calculable and orderly. Any decision that is not tested by the undeterminable is not free but an application or a continuation of a calculable process. A test of the undeterminable stands out in Han’s work. The undeterminable dwell in all determinable incidents.

 

Derrida defines justice as an experience of something impossible to experience. Such justice redefined by de-constructivism is not external to religion or art. Just like beauty, justice calls for calculation alongside the impossible to calculate. This makes possible the arrival of an undetermined future. Han’s work with uncertainty in certainty; the impossibility of determination with in determinacy does not depend merely on agnosticism. His work is closer to statistical fact, the true principle of nature, rather than determinism or complementary agnosticism. As seen in tree stems submerged in a deep blue, the stems are never identically reiterated in nature. An underlying way of reducing disasters in this world is to apply nature’s true diversity to the arbitrary human rules that are often suppressive and concentrative. I believe this is the message Han’s naturalized historical landscape conveys unconsci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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