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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Future lyricism

Hak-J Kim

과거와 미래에서 건너온 사이보그 전사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로댕의 청동시대, 앵그르의 샘과 오달리스크, 피카소가 아들 클로드의 장난감 자동차와 주전자 손잡이 그리고 항아리 등 오브제를 조합해 만든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 인도 힌두교의 춤추는 시바, 제주도의 돌하르방,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로봇 안드로이드.

이것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혹은 이것들이 한자리에 있게 만든 근거는 무엇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이것들을 분류 내지는 항목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분류며 항목인가. 미셀 푸코는 상식으로 통하는 분류와 항목이 사실은 임의적이며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했다. 한 틀이 다른 틀을 억압하고 살아남은 승리의 전리품이라고 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논법으로 말하자면 상징투쟁의 소산이며, 앙드레 말로 식으론 상상의 미술관이다. 김학제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미의 규준이며 준칙들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머릿속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의 규준이며 준칙들이 어떻게 호출되고 세팅되는가. 이 항목이며 분류 속엔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가 들어있고, 선사시대와 고전주의, 현대와 미래를 아우르는 시간의 단층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미술사와 종교와 민속이 탑재돼 있다. 얼핏 보면 이것들을 연결하고 연속시켜주는 개연성이 오리무중이지만, 뜯어보면 그 개연성이 보인다. 혼성이고 잡종이며, 하이브리드고 퓨전이며, 크로스오버다. 요샛말로 치자면 통섭이고 깔때기의 논리다. 온갖 이질적인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지점들이 합류되는 장소이며, 상식이 탈맥락되고 재맥락되는 장소이며, 세계가 재편되고 재구조화되는 장소이다.

예술가의 머릿속은 세계가 수리되고 정비되는 상상력의 공장이다. 언어는 그 자체 자족적인 구조와 생리를 가지고 있는 닫힌 체계라고 했다. 언어가 닫힌 체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전은 다만 죽은 언어들의 집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 의미가 생성되고 픽스되는 것은 말의 용법과 글의 용법 속에서이다. 그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상황과 전제, 문맥과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그 상황과 전제, 문맥과 맥락의 네트워크인 작가의 머릿속에서이며, 구조적으로 머리에 흡사한 생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이브리드스페이스며 월드와이드웹이며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흡사 머리의 유비적 표현을 보는 것 같다. 인터넷은 세계를 작가의 의식의 눈앞에 불러모아준다. 정보의 바다는 의식의 바다에 흡사하다. 그것은 바다답게 무한정 열려있다. 무수한 길들이 있지만, 그 길들은 언제든 지워질 수가 있고, 새로이 생성될 수가 있다. 무수한 관계들이 있지만, 그 관계들은 언제든 고쳐 잡을 수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의식 속에서이다. 그리고 의식과 더불어 픽스된 의미 또한 언제든 지워질 수가 있고, 새로이 생성될 수가 있고, 고쳐질 수가 있다. 바다가 그런 것처럼.

 

김학제는 자신의 의식이 가닿는 이질적인 지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리고 그것들이 원래 속해져 있던 맥락으로부터 일탈시켜 새로운 범주체계로 재편한다. 얼핏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보이는 그 재편은 그러나 사실은 통섭과 깔때기로 나타난 동시대 이미지의 존재방식을, 그리고 의식이 구조화되는 방식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다. 인터넷 환경 이후에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대 창작주체의 생리는 이미지의 생산보다는 소비에 경도돼 있다. 전에 없던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왕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 창작에 등치되는 것이다. 서핑과 맵핑 곧 정보의 바다며 이미지의 바다를 헤엄치다가 붙잡힌 이미지를 질료 삼아 자기 식의 인식 지도를 그리는 행위로 나타난 동시대 이미지의 작용방식에 대한 공감이 김학제의 작업의 저변에 면면히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의 핵심이 차용이다. 더 이상 오리지널리티는 없다. 다만 시뮬라크라 곧 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양 하는 것들,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하게 실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 두르러져 보이거나 미소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그 의미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거나 그 정체를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재현적인 척 하면서 사실은 재현을 배반하는 것들, 차이의 놀이로 정체성의 논리에, 유목의 놀이로 정박의 논리에 반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 놀이의 생리는 기생적이다. 즉 차용이 원본에 기생하는 이유는 다만 원본을 숙주로서 취할 뿐, 궁극적으론 자신의 자족적인 존재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며, 그 자체가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로 등극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김학제는 서양미술사를 차용하고, 종교적 아이콘을 차용하고, 민속적 오브제를 차용하고,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그렇게 차용된 이미지를 토대로 점토소성 과정을 거쳐 정교한 형상으로 빚어낸다. 그리고 그 형상을 이용해 주형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성 질감이 나는 형상을 떠낸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원본은 판이한 사본으로 재생된다. 컴퓨터에서 뜯어낸 부속을 비롯해 그 출처도 아리송한 온갖 기계 부품들을 조합해 몸체를 대신한다. 그 몸체는 비록 한 덩어리로 떠내진 탓에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여차하면 붕하는 기계음을 내며 움직일 것만 같다. 이로써 원본의 캐릭터들 모두가 일종의 사이보그들로 재생된다.

사이보그는 미래에서 온 전사들이다. 그래서 마치 미래(아직 오지도 않은 시대, 그래서 없는 시대)에서 온 전사들이 역사시대에 개입하면서 역사시대는 졸지에 낯설어지고, 물적 토대에 바탕을 둔 감각적 현실이 생경해진다. 이를테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유난히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것은 바로 다산과 풍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생명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비해 작가의 사이보그 비너스는 오히려 모계사회의 권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미술사를 재고하려는 페미니즘의 기획으로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기계 젖에선 젖 대신 윤활유가 흘러내릴 것만 같다). 앵그르의 샘을 패러디한 사이보그 여 전사 역시 유혹하면서 처벌하는 팜므파탈의 원형 내지는 전형 내지는 전범으로 읽을 수가 있고, 그 경우가 다르겠지만 다른 경우들 역시 원본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많고, 나아가 그 개연성은 아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열려져 있기조차 하다(이로써 일종의 하이퍼텍스트가 실현되고 있는 것). 가상이 현실에 개입하면서 현실이 붕 떠버린다고나 할까. 이처럼 역사시대에 출현한 사이보그 전사들로 인해 불현듯 현실이 낯설어지고, 가상과 현실이 전복되고, 가상이 현실에 비해 오히려 더 감각적인 현실감을 얻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는 신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생인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이보그는 미래에서 온 전사들이 아니라 현생인류들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들이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인체기관이 확장되고 연장된 것으로 본다. 나는 클릭 한번으로 원고를 보낼 수가 있고, 전화 한통으로 세상 끝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소식을 전해들을 수가 있고, 골방에 틀어박힌 채 천리 밖을 볼 수가 있다. 익명 뒤에 숨어 아무런 개념 없이 아무개를 해코지할 수도 있고, 관음을 위해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남자들을 호출할 수도 있다(당연히 당사자는 호출된 줄도 모른 채). 이쯤 되면 현생인류는 이미 이전의 인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미 현대(혹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미리 살고 있는 것이므로 그에게 미래는 없다.

미래를 테마로 한 소설이나 영화들이 거의 예외 없이 암울한 색채로 그려지는 것은 다만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나 브레이크가 고장 난 문명의 드라이브 때문만은 아니다. 현생인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세상 끝을 다 봐버린 만큼 그의 호기심은 시들해졌고, 미래를 앞당겨 산 만큼 그의 육신은 노후해졌다. 피곤하고 또 피곤하다. 어쩌면 몸과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비극은 예비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의식의 눈으로 세상 끝을 봤고, 그 의식의 귀로 세상 끝을 들었다. 미디어는 아마도 세상을 광속으로 변하게 할 것이고, 미디어에 의해 개발된 인간의 의식은 광속보다 빠르게 세상을 먼저 보고 들을 것이다. 빠른 것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혹,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가는 것은 다만 세상의 껍데기일 뿐, 정작 그 속은 세상이 핑핑 돌아가는 줄도 모른 채 정박보다 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전이 대개는 어둡게 채색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김학제는 자연을 대질시킨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잊고 있었다. 우리보다 더 먼저 살았고, 인류가 한갓 전설이 된 이후에까지 더 오래 살아갈, 그리고 모더니즘 이후로만 쳐도 수백 년에 걸쳐 문명이 파괴한 것을 일순간에 복구할 자연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진즉에 그 끈질긴 생명력에 마땅한 경외감을 거둬들였고, 그 무한한 스케일에 마땅한 두려움을 우습게 여겼다. 하지만 한때 자연에서 신을 발견한 파스칼 같은 사람이 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 무한한 스케일이 곧 신이며 숭고다. 자연 속에 숨은 신이 숭고다.

작가는 그 숭고의 흔적을 찾아서 세상 끝으로 간다. 이번에는 다만 의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갔다. 가서, 수천수만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편집을 하는데, 편집을 하는 이유는 풍경이 더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숭고가 더 잘 드러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조각을 이미지로 중첩시킨다. 처음엔 디오라마 식으로, 이를테면 배경그림 앞에 조각을 포치하는 식을 거쳐, 나중에는 아예 조각을 이미지로 만들어 배경그림에 합성한다. 그래서 그렇게 합성된 사진 속에 무한한 자연과 사이보그로 진화한(?) 인간이 담겨진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성의 옷을 입은 그는 무심한 자연에 난데없이 끼어든 이방인처럼 보이고, 숭고한 자연에 내팽겨진 고철더미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미래서정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무슨 종말에 대한 알레고리 같다. 적어도 현재 상황으로 유추해보건대 사이보그는 인류가 갈(진화할) 수 있는 끝이다. 인간은 이처럼 그 끝에서 기껏해야 금속덩어리나 고철더미에 지나지가 않는데,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하고, 무한하고, 무심하다. 인류 마지막 날(지구가 끝장나는 날 같은 날은 없다. 다만 인류가 끝장나는 날이 있을 뿐), 금세 자기를 복원하고 복구한 자연을 쳐다보는 사이보그 인간이 슬프다. 아름답고 숭고한 자연과 대비되면서 감미롭게 슬프다.

Cyborg warriors from the past and the future

 

 Kho, Chung-Hwan(art critic) 

 

Venus by Willendorf, David by Michelangelo, the Bronze age by Rodin, Sam and odalisque by Ingres, a monkey hugging a cub that Picasso made by combining the objets such as a toy vehicle of his son Claude and a pot handle and a pot, the dancing Siva of Indian Hinduism. Stone Hareubang of Jeju island, Robot Android in the movie ‘Star wars’. What is the ground that brought these in one place or made them in one place? Is it inevitable or coincidence? Can these be called classifications or items? In that case, which classifications and items are they? Michelle Foucault said that the classification and item that pass for a common sense is in fact arbitrary and the result of ideology. It’s called the loot that one mold suppressed another and survived. According to Pierre Burdieu’s logic it the outcome symbolic struggle, and according to Andre’s way of saying it is the art gallery of imagination. They are the standards and regulations of art in Hakje Kim’s brain. Then, what is happening now in the brain of the author? How are standards and regulations of art called and set? In this item and classification, there are Western art history and Eastern art history, prehistoric times and classicism, and the fault of time that embraces the current and the future is included. And the art history, religion and folklore are loaded. Although at a glance the probability that connect these and continue them is obscure, you can see its probability if you look into it. It’s mixed and crossbreed, hybrid and fusion, and crossover. To use these days’ words, it’s the logic of consil¬ience and funnel. It’s the place where various different formal semantic branches meet, it’s the place where the common sense loses its context and gets another context, and it’s the place where the world is reorganized and restructured. Artist’s brain is an imaginary factory where the world is repaired and organized. A language was called a closed system that has self-sufficient structure and physiology of its own. That a language is a closed system means that it cannot have any meanings in itself. Therefore the dictionary is nothing more than a home of dead languages. It is in the use of speech and writings that its meanings are created and fixed. It’s in the environment and suppositions, in the context and its contextual relation. It’s in the author’s brain which is the network of those environment and suppositions, context and its relations, and the ones that have the physiology similar to the brain are hybrid space, world wide web and the internet. The internet looks as if it’s an analogic expression of the brain. The internet gathers the world in front of the author’s sense of eyes. The sea of information is similar to the world of senses. It’s infinitely open as the sea. There are numerous routes, but those routes can be erased any time and recreated. Although there are numerous relations, those relations can be fixed at any time. There is nothing definite. It is in one’s sense that its meanings are defined. Along with the senses, the fixed meaning can also be erased, recreated and fixed. Just as the sea does.
Hakje Kim gathers different points in one place where his senses go. And he make it depart from the context where it
originally belonged and reorganize them into a new category. This organization, which at a glace seems arbitrary and willful, has been called to testify the existing method of contemporary image that appear as consilience and funnel, and the method that the senses are structured. Although it receives some elastic¬ity after the internet environment, the physiology of contempo¬rary creation subject is more immersed in consumption rather than production. A special method of existing image rather than creating nonexisting image is applied to the creation. The sym¬pathy runs through Hakje Kim’s works about the contemporary image application method that appear in the action of recogni¬tion map of its own using as a substance the caught image while swimming in the information sea for surfing and mapping, and in the image sea. And the essence of that flow is borrowing. There is no more originality. There are only Simulacra, that pretends to exist while not having real existence, something that are accepted as ex¬isting by chance or publicly, those whose meaning constantly slides while looking noticeable or making slight differences or its existence unable to be caught, those that betray reappear¬ance while pretending to be reappeared, those against the logic of stagnation for the play of difference and against anchor logic for nomadic play. The physiology of the play is parasitic. That is to say, the reason that the borrowing is parasitic on the original is that it takes the original as a host only, but in the end it is to obtain the self sufficient existence, and this itself is to accede to a new originality. Let’s get back to the beginning. Hakje Kim borrows Western art history, religious icon, folklore objet, and the image of public cul¬ture. Such borrowed image is treated as a clay and formed into minute shape. Next the mold is made from the shape, and lastly the new shape is made of glistening metal texture whose mate¬rial is stainless steel. Through this series of procedure, an origi¬nal is regenerated as a different copy. The body is substituted by the combination of various machinery parts whose origin is unknown, including the parts that are taken from the computer. As the body has been made into one piece, it feels likely to move with machine sound although it will not really happen. This way all the characters of the original are regenerated into a kind of cyborgs. Cyborgs are warriors that came from the future. So, as the war¬riors from the future(the era that has not come, so the era that does not exist) intervenes, the historic era abruptly becomes un¬familiar, and the sensuous reality based on the material ground becomes unfamiliar. For example, the Venus of Willendort repre¬sent fertility and richness. The reason that it particularly stressed the bosom and hip is to stress the fertility and richness, and to stress the life. Compared to this, the cyborg Venus of the author seems to stress the power of the maternal society, so if we read it as the feminism plan to reconsider the art history, would it be an overstatement?(In a machine bosom, lubricating oil seems to flow instead of milk) A female cyborg, the parady of Ingres Sam, can be read as the original or as a prototype or as an example of Femme Fatal that punishes while seducing the person, and as the cases may be different, in other cases they are quite likely to be read differently, and moreover the probability is even uncon¬trollably open(this way, a kind of hypertext is being realized). As the imaginary intervenes in the reality, the reality seems up in the air. Due to the cyborg warriors that appeared in the historic era like this, the reality suddenly becomes unfamiliar, the imagi¬nary and the reality are keeled, and the imaginary have rather more sensuous reality feeling than the reality.
But after careful consideration, this story is not about nean¬thropic human beings but about the current human beings. Cyborgs are not from the future but are current human beings. There maybe slight differences, but we all are cyborgs. Marshal Mcluhan considers the media as the extension and expansion of human organs. I can send a draft at a click, listen to events and news at the end of the world with one phone call, and can see far away in a small room. Hiding behind anonymity, I can criticize some one without any concept, and call every men and women for Kwan Yin(Of course without letting the person know that he/she is called). Now, shoudn’t we say that the current human beings are already living in a totally different dimension than previous human beings? He is already living in the future, not in the present(or today). As he is living in the future beforehand he has no future. The reason that the novels and movies whose themes are about the future are depicted in gloomy color without fail is not only because of the ruthless human desire or civilization drive whose brake is out of order. The current human beings have lived too long. As he has seen the end of the world his curiosity dwindled, and as he has lived in the future beforehand his body got older. Tired and again tired. Maybe the human tragedy have been prepared from the separation of the body and consciousness. His eye of consciousness has seen the end of the world and his ears heard the end of the world. The media will probably change the world at a light speed, and the human consciousness developed by the media will see and hear the world faster than the light speed. The fast look stagnant. Maybe it really is instead of looking so. What moves around is the crest of the world only, isn’t the inside having a deeper sleep than stagnancy without knowing that the world is moving

around fast? What is sure anyway is that the future vision is usually colored dark. Here Hakje Kim makes the nature confrontation. We have forgotten the world for long. We have been forgetting the existence of nature who has lived before us, who will live long until the humans will only become a legend, and who will instantly recover those that the civilization has destroyed at least for several hundred years after modernism only. We early collected the awe that its constant vital power deserves, and belittled the fear that its infinite scale deserves. But there were times like when there was Pascal who discovered a god in nature. That infinite scale is the god and nobility. The god that hides in nature is nobility. The author goes to the end of the world looking for the traces of that nobility. This time he really went instead of letting his consciousness go. There he takes thousands of pictures. Then he make editions, the reason of which is not to make them more plausible but to reveal its nobility better. And he puts the pieces on the image. At first in a diorama way, for example he puts the pieces in front of the background, and later he makes the pieces into images and synthesize them with the background. And in those photos thus synthesized, infinite nature and the humans that evolved(?) into cyborgs are included. He clanned in glistening metal garment looks like an alien who intervened in indifferent nature and, l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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