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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ae Soo

땅과 하늘 사이에서

 

폴-앙투안 미켈(Paul-Antoine Miquel) · 프랑스 뚤루즈 2대학 현대철학과 교수 · 에라피스 연구소

번역 · 황수영 ·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하늘>이라는 제하의 작품들은 《Colors of the Bamboo》, 《Trees from the People》, 그리고 《The New Wave》에 이은 김대수 작가의 네 번째 작품집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내가 의도한 특정적인 관점으로, 즉 서양철학자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김대수의 작품에 대한 내재적 해석이기보다는 그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서 그의 작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봄으로써 그 작품 세계의 풍부함과 보편성을 파악하고자 함이다.

 

   비록 작가가 직접적으로 그 길을 제안하지 않더라도, 김대수의 작품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심층적 전통 안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땅으로부터 인간을 거쳐 하늘로 나아간다. 이러한 운동의 기반에는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 그렇지만 스스로를 간파하게 해 주는 것, 보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보이게 하는 것, 무의식이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자각하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국철학의 근본적인 장소들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 철학의 사유는 서양적 사유와 달리 존재하는 것 이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적 사유가 태동한 그리스 철학에서는 만물의 근본은 불변부동의 존재이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만물이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모태(matrix)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존재가 아니라 운동(movement)이 있다. 운동은 비존재(non-being)에서 존재(being)로, 그리고 존재에서 비존재로 끝없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존재는 비존재 옆에 있다. 존재는 비존재로, 비존재는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늘은 땅 옆에 있다. 공(空)은 색 옆에 있다. 만질 수 없는 것이 만져지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구조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것은 열림을 내포하는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작품이 뿌리박은 문화보다는 그것이 내포하는 열림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열림을 통해서 우리는 서양적 프리즘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완전히 동양적 세계 속에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서양은 그 근대성의 차원에서 인간을 아주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아마도 너무 높은 곳에 놓은 것 같다. 서양 세계에서는 인간의 오만함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힘인 동시에 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하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대수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에 예속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인간은 주인이자 소유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그곳에서 인간이 자연화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자연화는 《Colors of the Bamboo》로 부터《Trees from the People》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연화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실제로 자연(nature) 안에 나의 본성(my nature)이 있고 나의 본성 안에도 자연이 있다. 

 

   이 운동은 단지 이미지들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각 작품의 이미지와 제목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상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가지들이 얽혀 있는 나무가 으로 둔갑했거나 작은 나무숲이 인간군상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관점을 역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무는 더 이상 나무만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이 이 이며 이것이 또한 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곧 자신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나무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나무보다 더 높이 있거나 그것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가 내 마음이 호수이고, 내 허파는 숲이 아닌지 자문한 것처럼 김대수에 의하면 우리 영혼 자체가 가 된 것이다. 이 백색은 또한 모든 색의 모태이자 예술가의 고향을 지시한다. 반대로 나무들과 풍경들, 동물들은 인간에 접속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바라보듯이 그것들도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그것들은 인간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페소아의 주요 작품인 『비평안의 서(非平安의 書, The Book of Intranquillity)』를 기꺼이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이 솟은 풀들 위로 /놀란 눈들이 그런 것처럼 /외로운 해바라기들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우리를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상호접속, 이러한 소통가능성은 동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서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동서양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인간 속에 그리고 인간을 자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열어보자.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처럼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여행 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 이 여행은 순환적인가? 우리가 땅 속에서 하늘을 발견한 것처럼 하늘 속에서 땅을 재발견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접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하늘로부터 인간을 거쳐 되돌아올 수 있을까? 마치 우리가 인간 덕분에 땅을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선 이 여행은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자 한다. 문제는 하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의심할 여지 없는 김대수만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모든 국면을 이용한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사진이, 말하자면, 작품의 세 번째 눈을 드러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기술의 눈이다. 하나의 그림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한다. 그러나 사진은 기술적 도구의 사용에 의해 비인격화되고 객관화 된다. 끌리셰(cliché)는 이와 같이 도구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끌리셰 안에 지각적이고 주관적인 유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유희, 이 소실선들 (vantage points)을 통해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된 것을 잇는 표상의 관계를 파악한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에서 라는 제목의 사진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표상 관계는 상당히 드물다. 예를 들면 에 등장하는 나무와 열매들은 풍경 속의 대상인지 아니면 풍경 자체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나무는 대상인 동시에 그것이 나타난 틀이나 공간이기도 하다. 나무는 단지 하늘이라는 배경 위에 있는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를 인간화 할 경우에는 더욱 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에서 나무들이 절단되는 공간은 동시에 한 여자의 육체를 그리고 있다. 이 점에서 김대수의 작품을 『루체른 근처 공원(Park bei Luzern)』이나 『신밧드의 항해(Sindbad der Seefahrer)』같은 파울 클레(Paul Klee)의 몇 몇 작품들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언가가 배경과 형상 사이에, 또는 표면과 깊이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대립들을 이미 넘어서서 작동하고 있다. 이로써 그의 작품은 더 이상‘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하늘> 연작에서는 이보다 더 특별하게‘가시화하는’방식이 드러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대상들은 구름들이다. 그들은 흰 것일 수도, 회색빛 일수도, 색깔을 띤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름은 다른 것들과 똑 같은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요소들로 분해할 수 없고 뉴튼 역학의 법칙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 복잡하고 유연하며 다양한 형상을 가진 대상이다. 노르베르트 비너(Norbert Wiener) 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사이버네틱스』의 서두에 묘사한 구름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이 관점을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구름은 하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하늘 자체가 흐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하늘이 더 깨끗해질수록 우리는 이 대상들을 덜 보게 된다. 그때 우리는 푸른 하늘과 햇빛 사이에서 색깔, 색의 대조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있건 없건 간에, 번개불의 불연속적 형상들이 있건 없건 간에, 구름 위에 새들이 있건 없건 간에, 이 이미지들에는 어떠한 소실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작품에서 완전히 사라진 관찰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더 이상 세계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순수한 색깔로 향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정화되는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색깔은 결코 완전히 순수한 것이 못 된다. 공이 거기에 언제나 거주한다. 하늘의 푸른 색과 오렌지색의 태양빛 사이에도 최소한의 대조가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최소한이다. 번개의 얼룩무늬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무한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거기 살고 있는 바로 그 무한으로부터 하늘을 분노하게 하고 우리를 바라본다.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은 『나지아(Nadja)』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내가 누구에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아는 문제로 되돌아온다고 그는 대답한다. 김대수의 멋진 하늘들은 점차로 인간에 의해 사로잡히는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도 무감동(impassible)을 향해 더 멀리 나아가게 해주는 것 같다. 즉 불교적이고 도가적인 무위(inactivity)를 향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척도로 본 신들이다. 인간이 이러한 신들에게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것들은 동양적인 것 속에 거주하는 서양적 특징과 같다. 이러한 서양적 특징에 언제나 약간의 동양적인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해 덧붙이자면 그것은 소용돌이(vortex)이다. 어떤 끌리셰(cliché)들에서 하늘의 불은 소용돌이로 변한다. 김대수에게 고유한 이미지배치(cadrage)에서 이 과도한 소용돌이는 이따금 사진의 영역을 넘쳐난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나무들이 솟아난다. 우리는 사진작가의 눈이 없이도 거기에 있다. 마치 기술적 도구라는 세 번째 눈으로부터 유래하는 우주 생성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비인격적 이야기는 물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이야기는 점차 인간적 기술의 산물을 관통한다. 그것은 인공이 재구성한 자연이다. 게다가 이 기술은 아마도 위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술적 인간성 속에서 어떤 비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해 너무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서울 구도시의 궁전들을 신도시 남쪽 지역의 과도한 탑들과 공존하게 하는 바로 그 비인간성이다. 우리가 환기하는 소용돌이는 단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를 사물들의 극성(polarity)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 극성은 매 순간 역전될 수 있다. 선은 악으로, 인간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역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시대와는 반대로 오늘날 책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인 것이다.

작가 노트 -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 

 

김대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태초에 천지와 사람은 이와 같이 창조 되었고 우리는 이렇듯 천지의 창조를 이룬 빛을 경외하며 세대를 이어 살아 가고 있다. 그렇다면 빛의 본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빛의 근원인 태양광을 우리는 자연광으로 인식하며 백색광이라 한다. 그러나 백색광이라고 할 때의 백색(白色)은 물감에서의 흰색은 아니다. 빛의 색을 백색이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빛 자체는 색이 없(無)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모든 색의 물감을 섞으면 검은(黑)색이 되지만 반대로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모든 파장의 빛을 합하면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게 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어떻게 보면 이런 빛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 빛은 눈에 보이는 모든 파장의 색(色)을 포함하고 있지만, 빛 자체는 눈으로 볼 수 없(空)기 때문에 빛의 색은 즉 공인 셈이다. 이런 빛의 본성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빛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nothing)이 아니라 무지갯빛 모든 파장의 색(everything)을 포함한다. 또한, 빛 자체는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을 함축하면서도 투명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빛을 백색광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백색은 빛을 상징하는 색이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한다. 일찍이 19세기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눈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흰옷을 입고 있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오페르트(E. J. Oppert)는 『조선기행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에서‘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고 말하고 있으며, 라게리(V. de Laguerie)도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걸어가는 모든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흰색을 숭상하고 흰옷 입기를 즐겼다. 우리는 백색을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구극(究極)의 색, 불멸의 색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백의의 습속은 단순히 옷감 때문에 선택된 색감이 아닌 하늘과 땅을 숭배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백의민족이 아니라 빛을 입은 민족이라 생각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고 노래한 시인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하늘을 경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 민족은 흰색으로 상징되는 빛의 근원인 하늘을 품은 진정한 ‘빛의민족(白衣民族)’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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