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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T SITE

전시 개요

• 전시  제목: FELT SITE

• 참여  작가: 임주연

• 전시  기간: 2014.10.16(목) - 11.15(목)

• 전시오프닝: 2014. 10.16(목) 6PM

• 전시  장소: LIG 아트스페이스

• 관람  안내: 월요일-토요일 10:30am -6:30pm / 매주 일요일 휴관 / 무료관람

 

전시 소개

너무 먼, 너무 가까운, 사이에서 흔들리는

 

 임주연의 그림은 원래 옷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옷이 뭔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 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옷은 공공연한 계급과 신분의 기호이며 표상이다. 유니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통의 옷도 그렇다. 여기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 계급론이 이런 사실 내지 등식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되겠다. 즉 문화에도 계급이 있다.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향유하고 접근가능한 문화가 따로 있고, 저런 계층의 사람들이 향유하고 접근 가능한 문화가 따로 있다. 여기서 문화란 감각적 질료의 형식을 빌린 물적 토대 내지 근거는 물론이거니와 미의식이나 사사로운 취향 내지 취미와 같은 비물질적인 관념과 가치관 일체를 아우른다. 이런 문화 계급론으로부터 파생된 게 사물계급론이다. 즉 문화에 계급이 있듯이 사물에도 계급이 있다. 이런 사물계급론의 밑바닥에는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의식이나 사사로운 취향 내지 취미와 같은, 관념 내지 가치관과 같은, 그 자체로는 비물질적인 것들마저 물질로 환원하려는 자본주의의 욕망이 작동한다. 페티시즘 곧 물신이 그것으로서, 이런 물신에 의하면 모든 것은 상품으로 환원되어져야 한다. 심지어 미의식이나 사사로운 취향 내지 취미와 같은, 그 자체로는 비물질적인 관념이며 가치관마저도. 옷 역시 사물의 한 종류이며, 따라서 이런 문화계급론 내지 사물계급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여기까지가 우리 모두 제도화된 사회 내지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본, 옷의 일반적인 용법이다.

그렇다면 임주연은 옷을 매개로 이런 제도화된 사회며 자본주의 시대를 그리고, 계급과 신분의 표상을 그리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옷을 그리는 작가의 관심과 태도와 입장은 좀 다른, 어쩌면 상대적으로 더 심층적인, 그리고 사사로울 수도 있는, 그러면서도 공감을 얻는, 그런 층위에 속한 것 같다.

 

다시, 임주연의 그림은 원래 옷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하게는 벗어놓은 옷들이다. 그런데, 이 옷들을 그린 그림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옷 아님 저런 옷이라고 표기해 놓은 제목이 아니라면, 도통 옷을 그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저 순수한 형식논리에 천착한 추상회화 같다. 작가는 말하자면 옷을 소재로 옷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렸다. 옷은 다만 구실일 뿐, 회화를 그렸다. 그렇다면 예컨대 자연을 추상화한 몬드리앙의 경우에서처럼, 작가에게 옷은 다만 회화의 형식논리를 위한 매개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고, 특히 이런 회화의 형식논리는 근작에서 더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다? 그럼, 뭔가. 벗어놓은 옷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일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표상으로서의 옷을 벗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 보이게 될 무엇, 평소에는 그 표상에 가려 드러나 보이지 않을 그 무엇을 그리는데 관심이 있다. 그게 뭔가. 작가는 이런 옷 아님 저런 옷이라고 표기해 놓은 일련의 그림들을 에고 시리즈라는 큰 제목으로 아우른다. 에고? 바로 옷을 매개로 작가가 진정 그리고 싶은 거다. 작가는 옷을 매개로 옷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옷에 연루된, 옷에 스민 자아, 주체, 에고를 그리고, 그 실체(향후 흔적으로 심화 내지 이행할)를 그리고 싶은 거다. 그리고 이런 옷에 연루된, 옷에 스민 에고 그리기는 향후 근작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면서 심화되고 변주되는 주제의식이 될 것이었다.

 

다시, 작가는 벗어놓은 옷들을 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 옷을 벗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 보이게 될 무엇을 그린다고도 했다. 그 무엇이 뭔가. 작가의 벗은 몸이며, 그 벗은 몸으로 대리되는 작가의 정체성이다. 알다시피 작가는 자신의 탈의과정을 소재로 그리고 있고, 따라서 다름 아닌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서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런 자기반성적인 그림은 옷을 매개로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 내지 흔적을 역추적 한다는 작가의 기획에도 그대로 부합한다. 눈치 챘겠지만, 그동안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벗어놓은 옷을 그리던 것에서 탈의 곧 옷을 벗는 과정을 그리는 것으로 이행한 것이다. 사물현상(전통적인 장르 개념으로 치자면 정물화?)에서 과정으로 무게중심이 옮아온 것이다. 아마도 사물현상만으론 주체의 실체 내지 흔적을 역추적하기에 역부족임을 느꼈고, 자신이 직접 개입이 될 때 그 실체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일 터이다.

여기서 사물현상이라는 고정된 실체로부터 과정이라는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대상으로의 이행에 주목할 일이다. 과정이란 뭔가. 경과와 추이 곧 시간이다. 이렇게 해서 시간개념이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 인간은 시간을 살고, 짐승은 순간을 산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의식하면서 산다는 말이며, 순간은 이런 자기반성적인 과정이 결여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당연히 삶의 밀도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느슨한 밀도감과 상대적으로 긴박한 밀도감 같은. 그렇게 인간은 삶의 강밀도를 조율하는 삶을 살고, 짐승은 매순간 새롭고 절실한 삶을 산다. 짐승의 삶에 공허와 권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것은 느슨한 강밀도의 문제이며 몫인 것. 인간의 삶에 시간이 들어오면서 덩달아 인과 곧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도 같이 들어오고, 이로써 인과론에 바탕을 둔 자기반성적인 사유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시간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인식이며 자의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바로 그런 시간을 그리고, 과정을 그리고, 지속(지속되는 순간)을 그리고, 이행(이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주체에 대한 인식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처럼 시간을 표현한 것에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순간이 아닌 시간을 사는,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과거와 비교해보고 심지어 오지도 않은 미래에 견주어보는, 그리고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물리고 연동되는, 그런 존재가 불안정하고 비결정적이고 흔들린다? 그건,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중요한 포인트 두 가지로 치자면, 작가는 자신(자아, 주체, 에고)을 그리고 과정(시간)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옷을 벗는 과정을 그리는 것인데, 자신을 그리려면 거울이나 카메라와 같은 툴(작가 자신과는 또 다른 시선?)이 있어야 하고, 여기서 작가는 카메라를 조력자로서 취한다. 그리고 과정을 그리기 위해서(기록하기 위해서? 뭘 기록하는가. 존재의 실체? 존재의 흔적?) 타이머를 도입한다. 일상의 공간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작가는 일상을 산다. 옷을 벗는 행위며 과정도 이런 일상적인 모습에 속하며, 여기서 작가는 셀프타이머를 이용해 그 모습을 연속 촬영한다. 카메라도 굳이 작가를 겨냥하지 않고 작가 역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탓에, 그리고 그렇게 우연한 포착을 전제한 탓에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마치 실패한 사진처럼 하나같이 무심하고 무관심하고 무계획적이다. 당연히 의도적이고 전략적인 측면이 없지가 않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말하자면 방심한 모습이 무심하게 찍히고 기록될 때에야 비로소 주체의 진정한(최소한 만들지 않은 곧 가식적이지 않은)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체의 진정한 실체에 다가가고 싶고 그 실체를 붙잡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데, 그 결과는 탈의는 고사하고 다만 흔들리는 피사체며, 도통 뭘 찍었는지도 모를(그리고 뭘 그렸는지도 모를) 흐릿하고 애매한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역설인가? 그렇다. 주체는, 주체의 실체는 너무 멀리서 보면 아득해서 보이지가 않고,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온통 해체된,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저 눈앞에서 아롱거리는 비정형의 얼룩이나 자국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저 너무 먼 곳과 너무 가까운 곳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게 대면할 수밖에. 사실 주체에 실체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실체는 너무 먼 곳 아님 너무 가까운 곳에 정박해 있을 수 있고, 여기서 너무 먼 곳이나 너무 가까운 곳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이란 점에 주목할 일이다. 역설이라고 했던 건, 바로 그래서이다.

결코 대상, 사물, 객체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 그래서 인식할 수 없는 무엇, 그러므로 인식을 온통 흔들어놓는 무엇, 바로 자크 라캉의 오브제 아 아님 오브제 프티 아로 보면 되겠다(오브제란 대상 사물 객체란 말이며, 오브제 아란 대상화 사물화 객체화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란 말이며, 모든 오브제는 어김없이 이런 아 내지 프티 아를 유령처럼 동반한다. 그 자체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인식임을 밝혀주는 부분이며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은 멀리 있는 것인데(아득한 것인데 아님 인식 영역 바깥에 있는 것인데), 실제로는 마치 가까이 있는(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했는데, 이런 아우라와도 상통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주체의 실체가 어느 정도 손에 잡히다가도 불현듯 무분별한 조각들(붓질자국)로 해체되는 사이, 관음증적 실체(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작가의 그림은 자기가 자기를 보는 자기관음 내지는 자기반성적인 그림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여자가 옷을 벗고 있는 상황이며 과정을 그린 예사롭지 않은 그림이기도 하다)가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드러내다가도 느닷없이 그 욕망을 배반하는(작가의 전작이 옷이 아닌 그림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탈의가 아닌 그림을 그린) 사이, 감각적 실재와 회화적 실재 사이를 그려서 보여준다. 어쩌면 주체란, 주체의 실체란 이처럼 너무 먼 곳과 너무 가까운 곳 사이에서 그저 아우라 곧 다만 연막을 피워 올릴 뿐인,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고, 그런 불완전인식을 통해서만 겨우 인식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질 들뢰즈는 주체란 다만 주체라고 부르는 막연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게 작가는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체, 미끄러지는 주체, 이행하는 주체, 중첩되고 포개지는 주체, 어쩜 없는 주체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근작에서 작가는 또 한 번 의미 있는 변화를 시도한다. 탈의장면으로부터 풍경으로 이행한 것. 커튼 뒤로 보이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그린 것인데, 탈의장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풍경도 흔들린다. 탈의장면이 흔들리는 것은 사실은 주체가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주체가 풍경을 흔든다. 무슨 말인가. 외적으로 볼 때 탈의장면으로부터 풍경으로 소재가 달라진 것 같고, 자기를 그리던 것에서 자기 주변을 그리는 것으로 이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담 지금까지 작가 자신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주변관계 아님 아예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사물현상의 객관적 지평에로 관심축이 옮아온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탈의장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풍경도 흔들린다고 했다. 작가에게 풍경은 탈의장면과 하등 다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옷이 자기를 스치는 촉각 때문에 옷을 그렸고, 커튼이며 창문이 자기를 스쳐지나가는 시각 때문에 풍경을 그렸다. 촉각으로 옷을 그렸고, 시각으로 풍경을 그렸다. 촉각과 시각은 모두 몸에 속하고 감각에 속한다. 그렇게 작가의 감각이 연장되면서 옷을 그렸고, 자신의 감각이 확장되면서 풍경을 그렸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촉각은 시각과 하등 다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시각이 눈이라면, 촉각은 몸 눈이다. 촉각이 더듬으면서 보는 것이라면, 시각은 보면서 더듬는다. 말하자면 촉각지 내지는 촉각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시각은 촉각으로 확장되고, 촉각은 시각으로 연장된다. 다시, 감각의 분유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감각은 말하자면 몸으로부터 시각으로 그리고 촉각으로 확장되고, 그리고 모르긴 해도 미각이며 후각으로도 연장될 것이었다.

그렇게 흔들리는 풍경이며 흔들리는 탈의장면이 흔들리는 주체를 증언해주고 있었고, 어쩜 주체란 이처럼 감각이 분유되는 몸 위의 지점들, 확장되고 연장되는 지점들, 항상적으로 이행중인 지점들, 그러므로 유동적이고 비결정적인 지점들에 다름 아님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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